어쩌다 여기까지

법과 경제의 잣대로 세상을 바라보던 문돌이가 어쩌다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기초과학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따라서 첫 글로 이에 대한 답을 대신하고자 한다. 다소 의외일 수 있지만, 내가 화학에서 느낀 본질적인 즐거움은 철학의 근본적 궁금증과 그 기원에서 맞닿아 있다.

일반적인 문과생들처럼, 철학자들도 보편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무언가를 붙잡고 치열하게 논쟁하는 습성이 있다. 그 중에서도 플라톤을 비롯해 고대부터 많은 사람들이 답을 찾고자 했던 주제가 있는데, 바로 물질과 정신의 본질에 대한 논의이다. 마음이나 정신을 물질에 종속된 것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실체로 볼 것인지에 따라 입장은 크게 유물론과 유심론으로 나뉜다.

유물론은 세계의 근본을 물질로 보며, 정신이나 의식 역시 물질에 종속된 산물이라고 여긴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에서 시작해 현대에 이르기까지 과학은 물질이 먼저 존재하고, 정신은 물질의 복잡한 조직이나 작용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설명한다. 반면 유심론은 세계의 근본을 정신으로 보는 입장이다. 이 관점에 따르면 우리가 경험하는 물질 세계는 의식의 산물이며, 실재는 이러한 의식이 세계를 어떻게 매개하고 인식하는가에 따라 규정된다. 플라톤은 이데아 개념을 통해 현실은 초월적 이데아의 그림자로, 불완전하고 변화무쌍한 우리의 인식 저편에 진정한 실재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세계의 근원이 물질이냐 정신인가에 따라 두 가지 상반된 관점이 생겨난다.

그렇다면 우리가 세계라고 부르는 사회의 발전은 물질에 기반해 이루어지는가, 아니면 정신과 인식에 의해 이루어지는가? 일반적인 철학자들이 뚜렷한 근거 없이 언어로만 주장을 이어가는 것과 달리, 나는 그 해답의 실마리를 화학에서 찾았다. 가능세계의 개념을 동원해 현실과 괴리된 추상적 논의에 머무르기보다, 특정 현상이 도출되는 세계를 스스로 만들어내고 실험을 통해 실질적인 근거를 관측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에 존재하는 분자를 통해 우리는 해당 분자가 특정한 작용을 한다는 지식을 얻는다. 그렇다면 작용기를 변형해 새로운 분자를 만들었을 때, 그 분자가 어떤 반응성을 보일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리의 인식에 기반해 새로운 반응성을 예측하고 발견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러한 반응성을 가진 분자가 이미 실재하고 이것이 해당 반응성과 결부되어 있었기에 우리가 그것을 발견해낼 수 있었던 것일까? 아직 확답을 내릴 수는 없지만,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분자도 적절한 사고와 실험을 통해 새롭게 창조될 수 있다는 점에서, 나는 전자, 즉 인식에 기반한 창발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분자 수준에서 새로운 가능 세계를 비교적 쉽게 만들어내고 검증할 수 있다는 점, 바로 이 점이 내가 느꼈던 타 학문과 차별화되는 화학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재밌는 철학자들의 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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